“조선시대 과거시험”…경쟁률 5만대 1, 합격자를 ‘역대급 천재’로 부른 진짜 사연
열정과 광기, 21만명이 몰려든 조선 최고의 관문
1800년 3월, 조선은 특별한 이틀을 맞았다. 창경궁 춘당대에서는 왕세자 순조의 책봉을 기념한 과거시험, 즉 경과(慶科)와 인일제(人日製)가 잇따라 열렸다. 두 시험엔 무려 21만5417명의 응시자가 몰렸고, 첫날 답안지 제출자는 3만8614명, 둘째 날 3만2884명이었다. 그러나 최종 합격자는 단 12명(경과 10명, 인일제 2명)뿐이었다.
- 첫날 경쟁률 : 1만1184대 1(실제 제출자 기준 3861대 1)
- 이튿날 경쟁률 : 5만1790대 1(실제 제출자 기준 1만6442대 1)
과거시험은 단순한 채용시험이 아니라, 조선 최고의 ‘엘리트’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한 자리를 두고 수만명이 각축을 벌이며, 합격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역대급 천재”로 인정받았다.
시험의 나라, 조선
과거시험은 조선 시대의 등용문이었다. 응시자는 평균 30년을 각고의 노력 끝에 시험장에 들어섰다. 정기시험은 3년마다 진행됐고, 네 번의 국가시험(소과 초시, 소과 복시, 대과 초시, 대과 복시)을 모두 통과해야 단 33명의 문과(대과) 합격자가 될 수 있었다.
- 소과 초시 합격자 약 1400명 → 복시 통과 200명(생원·진사 각 100명)
- 대과 초시 합격자 240명 → 복시 통과 33명만이 최종 문관 진출 자격
이 구조는 단연코 인류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경쟁을 강요했다. 실패하면 최소 3년을 더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은 곧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칠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과거장의 실제 풍경: 난장판과 입시비리의 온상
응시 경쟁이 이처럼 격렬하다보니, 부정행위와 난장판은 불가피했다. 김홍도의 풍속화 ‘공원춘효(貢院春曉)’는 시험장 풍경을 여과 없이 그려낸다.
입시비리 전문 ‘6인조’
- 거자(응시생) 1명
- 문장 전문가(거벽) 1명
- 글씨 담당(사수) 1명
- 자리 선점 및 잡무 담당(선접·수종·노유 등) 3명
이들은 각자 역할에 따라 밤을 새워 시험장 앞에서 자리를 맡았다. 시험 문제 게시판 앞 좋은 자리를 두고는 우산, 막대기, 쇠몽둥이까지 동원해 ‘자리 쟁탈전’을 벌였다. 치열한 몸싸움 도중 압사자까지 발생할 정도였고, 불법적으로 만들어진 참고서, 부정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충격적인 부정행위 실태
입시비리는 현대 못지 않았다.
- 노끈을 동네에서 시험장까지 땅 밑에 묻어 쪽지를 주고받음(실제 적발 사례)
- 답안 미니북을 옷속에 숨김
- 콧구멍, 속옷, 심지어 몸속까지 커닝페이퍼를 감춤
- 관리(등록관, 봉미관 등)와 결탁해 답안지 바꿔치기, 미리 합격자 내정
실제 부정행위로 인해 1699년(기묘과옥), 1712년(임진과옥) 과거시험이 전면 무효처리, 응시관계자 처벌, 합격자 처형 등 대형 스캔들이 벌어졌다.
21만명 속 12명, 천재를 넘어선 ‘운명의 사나이’
너무 많은 답안지(최대 7만장)를 단기간에 채점해야 했기에 선착순, 임의추첨, 심지어 채점관 심기대로 합격자가 나올 때도 많았다. 정약용이나 박제가 등 당시 실학자들은 “명문장도 심사관이 지치면 눈감고 버린다”, “합격자는 운이 반”이라는 통렬한 비판도 남겼다.
이렇다 보니, 단 한 번이라도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들은 단순한 수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엄청난 압박, 경쟁, 사생결단의 준비, 그리고 강운까지 두루 갖춘 ‘역대급 천재’로 국가적 인정을 받았다.
천재란, ‘과거급제자’의 이름에 붙는 불멸의 찬사
조선의 과거시험은 단순히 힘겨웠던 옛 제도가 아니다. 그 과정을 뚫고 합격한 이들은 오늘날 수재, 천재, 시대정신의 전형으로 남았다. 치밀한 예선과 본선, 대규모 공부와 멘탈 관리, 현대적 입시제도보다 몇 배 더 가혹했던 뿌리 깊은 경쟁의 세계.
21만 명 중 12명, 천재라는 말이 두 번 따라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급제란 다른 무엇도 아닌, ‘국가가 공식 인정한 최고의 머리’에 내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졸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