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조 원이다, 무조건 질러라”
2014년 9월 17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옆 한국전력 본사 부지 입찰장이 술렁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감정가의 세 배, 무려 10조 5500억 원을 써내 경쟁자 삼성전자를 제치고 낙찰받았기 때문이다. 이 날 입찰 현장에서 정몽구 당시 현대차그룹 회장은 참모들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 “6조 원이다, 무조건 질러라.” 그러나 실제 최종 금액은 ‘질렀다’는 표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평가가는 3조 3346억 원, 업계가 예측한 실거래가는 4~5조 원 수준이었는데, 현대차는 그보다 두 배 넘는 금액에 계약했다. 주가는 발표 직후 폭락해 하루 만에 시가총액 8조 원이 증발했다. 언론은 “기업 역사상 최악의 부동산 투자”라 혹평했고, “미래가 아닌 허영심이 부른 베팅”이라는 비판까지 쏟아졌다. 그러나 현대차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 회장은 “공장은 어디서든 만들 수 있지만 브랜드의 중심은 장소가 만든다”고 말했다.

그때는 ‘미친 짓’이었다
2014년 한국전력은 부채 감축을 위해 강남 테헤란로의 본사 부지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이 눈독을 들였으나, 대부분이 “3조 원대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내부 전략회의를 통해 ‘랜드마크 확보=브랜드 이미지 제고’로 해석했다. 당시 정몽구 회장은 런던 재규어 본사, 도쿄의 도요타 시티 등을 사례로 들며 “글로벌 톱 브랜드에게 본사는 상징”이라는 철학을 강조했다. 현대차, 기아, 현대모비스 3개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참여했고, 지분 분담 비율은 각각 55%, 20%, 25%였다. 이듬해 10조원 낙찰 소식이 발표되자 직원과 주주들은 “미쳤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영진조차 “차라리 그 돈으로 친환경 공장과 연구소를 세웠다면 낫다”며 내부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였다.

10년 뒤, ‘미친 결정’이 만든 22조 원의 자산
시간은 그 판단을 뒤집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GBC 부지의 2025년 기준 실거래 시가는 22조 원 이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당 공시지가가 2015년 2560만 원에서 2025년 7394만 원으로 세 배 이상 상승한 데다, 인근 부동산이 모두 두세 배 뛰면서 가치가 폭등했다. 매입 당시 ‘비싼 땅’이었던 한전부지는 이제 ‘서울 도심의 마지막 핵심 입지’로 불린다. 10년 만에 8조 원을 잃었다던 그 땅이 12조 원의 이익을 남긴 효자 자산으로 바뀌었다. 특히 현대차가 건립 중인 GBC(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는 연면적 92만㎡, 105층(569m) 규모로 완공 시 세계 6번째로 높은 빌딩이 될 예정이다. 단순한 본사의 의미를 넘어 그룹 전체가 ‘미래 모빌리티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거점을 마련한 셈이다.

GBC, 현대차의 ‘브랜드 심장’으로
GBC는 단순한 초고층 건물이 아니다. 현대차그룹이 추진 중인 UAM(도심항공모빌리티), 자율주행, 로봇, AI, 전기차·수소차 기술을 집약한 **‘모빌리티 허브’**로 설계됐다. 지상부는 업무, 컨벤션, 호텔, 공연장으로 구성되고, 상층부는 글로벌 연구조직이 입주할 예정이다. GBC가 완공되면 그룹의 디자인 센터, 현대로템 기술연구소, 현대엔지니어링 스마트빌딩 사업부 등 핵심 인재들이 한 공간에 모인다. 이는 생산공장 중심의 제조기업에서 ‘혁신 생태계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상징이다. 또한 GBC는 서울의 MICE(국제회의·전시) 중심축인 코엑스와 연결되어, 현대차를 ‘도시와 융합한 글로벌 브랜드’로 재정의하게 된다.

단기 손실보다 미래 자산을 본 안목
정몽구 회장의 ‘질러라’ 발언은 재계의 전설이 됐다. 당시 시장은 단기 수치로 회사의 결정을 평가했지만, 그는 장기적 흐름 ― 도시의 가치와 브랜드의 상징자산 ― 을 읽었다. 일반 제조업은 재무성장률이 5~10년 단위로 변하지만, 부동산과 브랜드 가치는 세대 단위로 지속된다. 실제로 현대차는 미국 조지아 전기차 공장, 체코 EV 센터 등 글로벌 투자를 병행하며 ‘자산 포트폴리오의 다국적 분산’을 꾀했다. GBC 부지 매입은 단순 투자라기보다 현대차의 글로벌 확장 전략의 중심축이 된 사례다. 당시 비판의 핵심이던 “비생산적 투자”라는 말은, 10년이 지난 지금 “브랜드 레버리지의 교과서”로 바뀌었다.

‘질러라’는 무모함이 아니라 전략이었다
현대차의 한전부지 인수는 8조 원의 단기 손실을 감수하고 22조 원의 장기 자산을 얻은 한국 기업사 최고의 역전극이다. 부지를 산 지 10년이 지난 지금, 정몽구의 결단은 ‘견고한 장기전략의 상징’으로 재평가된다. 단기 손익에 얽매이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위험 감내형 투자 리더십이었다. 이 사건은 기업 경영에서 ‘재무제표의 숫자’보다 ‘비전의 스토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시장은 당장의 주가로 비난했지만, 시간은 경영자의 안목으로 답했다.
2014년 “회장이 미쳤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말한다. “그의 미친 결단이 한국 도심의 지도를 바꿨다.” 그리고 그 부지 한가운데, 현대차의 새로운 심장인 GBC가 서울을 넘어 세계를 향해 솟아오르고 있다 — 이것이 바로 정몽구 회장의 ‘8조를 잃고 22조를 번 신의 한 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