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직접 들어간다”
천안함 침몰 직후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던 2010년 3월 말, 해군 특수전여단 소속 한주호 준위는 “경험 많은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며 위험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고 해역은 수심 약 25m, 강한 조류와 차가운 수온으로 젊은 UDT 대원들도 버티기 힘든 환경이었다.
한 준위는 “물 아래엔 내 아들 같은 아이들이 있다”며, 수색 5일째 되는 날까지도 맨 앞에서 잠수를 이어갔다.

낡은 장비와 반복 잠수가 부른 비극
당시 수색 현장엔 잠수병 치료에 필수인 감압챔버가 1기뿐이었고, 잠수요원들은 교대로 심해를 오가다 탈진과 잠수병 위험에 노출됐다.
한 준위는 1980년대 도입된 구형 장비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며, 반복 잠수로 이미 체력과 체내 상태에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결국 그는 작업 도중 호흡곤란과 의식 소실 증세를 보였고,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같은 해 3월 30일 끝내 순직했다.

천안함 참사, 그 속으로 뛰어든 UDT
천안함은 2010년 3월 26일 밤 백령도 서남쪽 2.5km 해상에서 침몰해, 104명 중 46명이 전사하고 58명이 구조됐다.
한 준위를 비롯한 UDT 수중파괴팀 요원들은 사고 다음 날 새벽 긴급 투입돼 배수·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구조·수색을 이어갔다.
구조함과 기뢰 탐지·구조 장비가 늦게 도착하면서, 대원들은 몸에 밧줄을 묶고 선체 내부까지 일일이 진입해야 했다.

“사나이 UDT”로 떠난 바다의 선배
1975년 입대한 한주호 준위는 35년간 잠수·특수작전에 헌신한 베테랑으로, 동료들이 인정한 ‘선배이자 교관’이었다.
영결식에서 UDT 대원들은 그의 운구 행렬을 막아서듯 둘러서, 고인이 즐겨 부르던 군가 ‘사나이 UDT’를 제창하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장례식장에는 정부 인사와 장병들뿐 아니라 실종 장병 유가족들도 찾아와, 자신들을 대신해 바다로 들어간 이를 눈물로 기렸다.

소말리아 해역까지 자원해 나간 ‘현역 최고령 파병자’
한 준위는 순직 1년 전인 2009년, 50대 초반 나이에 “실전 경험을 더 쌓겠다”며 소말리아 청해부대 1진 파병에 자원했다.
당시 부대 최고령자였던 그는 해적 퇴치 작전에서 직접 적선에 승선해 제압 작전에 참여하는 등 여러 차례 실전을 경험했다.
그가 고안·제작한 선박 침투용 사다리는 이후 아덴만 여명작전에서도 사용되는 등, 현장형 장비 개선에도 앞장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비부터 바꿔야 한다”던 베테랑의 역설
한 준위는 평소 훈련·작전 장비 개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저격수 표적기와 탄·뇌관 보호 상자 등을 직접 개선·제작해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구형 잠수장비와 부족한 감압 시설 속에서 구조작전을 수행하다 숨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사회적 공분을 불렀다.
천안함 구조 과정은 한국 해군 심해구조 능력과 장비 체계 전반을 되돌아보게 만든 계기로, 이후 관련 장비·인력 보강 논의가 이어졌다.

훈장 논란 끝에 뒤늦게 올라간 예우
정부는 처음에 한 준위에게 35년 근속자에게 수여되는 보국훈장 ‘광복장’만을 추서해, 공로에 비해 예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론이 거세지자 이명박 대통령이 특별 지시를 내려 충무무공훈장이 추가 추서됐고, 관련 포상과 추모 조치도 재정비됐다.
한 준위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교 제3묘역에 안장됐으며, 그의 이름은 천안함 용사들과 함께 국가 추모 서사에 포함됐다.

진해 앞바다를 지키는 동상
순직 1년 뒤인 2011년 3월 31일, 한 준위가 근무했던 진해기지사령부 인근 진해루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보트를 타고 작전 해역으로 향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은 받침대를 포함해 3m가 넘는 높이로, 바다를 향해 서 있다.
이 동상은 천안함 사건과 한 준위의 희생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물로,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리며 ‘해군의 영웅’을 기리는 장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