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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을 창설" 이순신 장보고와 함께 전설로 불리는 '해군의 아버지' 정체

aubeyou 2026. 2. 19. 16:30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이라는 이름

 

손원일은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광복 직후 “우리 바다는 우리가 지킨다”는 신념으로 대한민국 해군을 세운 인물이다.
해방 3개월 뒤인 1945년 11월 11일,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조직하며 사실상 한국 해군 창설에 착수했다.
이 공적으로 그는 훗날 초대 해군참모총장, 제5대 국방부 장관, 초대 서독 주재 대사를 지내며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렸다.

평안남도 강서에서 상하이까지, 꿈을 키운 청년 시절

 

1909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평양에서 자라며, 일제 치하에서 고문까지 당한 경험을 남겼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중국 해군부 유학생 선발에 합격해 독일로 건너가 약 3년간 항해학을 연구했다.
상하이 시절 각국 해군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해방된 조선에도 이런 해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 연루, 체포와 상업 활동

 

1930년 귀국 후 그는 상하이 독립운동단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에는 매부 윤치창과 함께 남계양행이라는 상점을 5년간 공동 운영했고, 이후 동화양행 상하이 지점장으로 파견돼 큰 수익을 올렸다.
이때 모은 자금은 훗날 해방 후 해군 창설과 함정 구매에 쓰일 ‘씨앗돈’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민간인 신분으로 만든 ‘해방병단’

 

광복 직후 미군정 하에서 군 조직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손원일은 1945년 11월 부산에서 해방병단을 출범시켰다.
이 조직은 곧 미군정에 의해 공식 해안경비대로 인정받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전신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미국 측에 직접 편지를 보내 해군 교관 15명을 초빙해 장병 교육을 시작하는 등, 제도·인력·장비를 동시에 꾸려 나갔다.

백두산함과 해병대, 실전에서 증명된 선택

 

손 제독은 개인 자금과 모금으로 한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구입해 들여왔다.
이 함정은 도입 3개월 만인 1950년 6월, 부산 침투를 시도하던 북한 특수부대 수백 명이 탄 적 선박을 격침해, 부산 방어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창설한 해병대 역시 인천상륙작전 선봉에 서서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부대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전통의 출발점이 됐다.

해군사관학교·해병대·군가까지 만든 조직 설계자

 

손원일은 해군병학교(현 해군사관학교)를 창설해 장교 양성 시스템을 구축했고, 해병대를 별도 전투병과로 세우는 작업도 주도했다.
또 전사편찬실과 해군음악대를 발족시켜, 해군의 역사를 정리하고 사기를 끌어올리는 조직·문화 기반을 마련했다.
그와 부인은 일본군가를 쓰던 해군 군가를 모두 한국식으로 새로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 독자 해군 문화 정립에도 기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국전쟁과 인천상륙작전, 최전선에 선 해군참모총장

 

해군참모총장으로 재임하던 그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 작전에 참가해 해상 전력 운용을 지휘했다.
연합국 해군과의 협력 속에서 제한된 한국 해군 전력을 최대한 활용해 상륙·재상륙 작전을 지원한 공로가 기록돼 있다.
1953년 국방부 장관 재임 2개월째 되던 해 대한민국 해군 중장으로 예편하며, 실무·정책 양쪽에서 해군을 이끈 흔적을 남겼다.

서독 대사와 최후, 그리고 국립현충원

 

예편 후 그는 초대 서독 주재 대한민국 대사로 임명돼, 서독과의 외교·군사·경제 협력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맡았다.
폭넓은 인맥과 온화한 성품이 유럽 외교 무대에서 높이 평가됐고, 이는 훗날 한국–서독 간 광부·간호사 파견 등 협력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
1980년 2월 15일 서울 마포구 자택에서 별세한 그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오늘날 이순신·장보고와 함께 ‘바다를 만든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