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한 그루가 불러온 ‘3차대전 위기’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단순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이 미군 장교 2명의 피살과 한반도 전면전 위기까지 이어지는 ‘도끼만행 사건’으로 번졌다. 미 2사단 소속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가 북한 경비병들에게 도끼·몽둥이로 집단 구타당해 사망하면서, 미국과 유엔군은 전면 대응을 검토할 만큼 강경하게 반응했다.

사건의 발단, ‘시야 확보용’ 가지치기
당시 유엔군 측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인근에 서 있던 미루나무가 관측·경계 시야를 가린다고 판단해, 한국군·미군 병력 11명이 공병과 함께 단순 가지치기에 나섰다. 북한 경비병들은 사전에 합의 없이 작업을 한다며 강하게 항의했고, 말다툼 끝에 약 30명 규모의 북한 병력이 몰려와 도끼와 몽둥이를 빼앗아 미군 장교들을 집중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보니파스 대위는 현장에서, 배럿 중위는 도주 중 치명상을 입고 끝내 숨졌다.

북한의 주장 “미군이 먼저 휘둘렀다”
북한은 이 사건을 ‘8·18판문점 사건’으로 부르며, 지금까지도 미국 책임을 주장한다. 선전매체들은 “도끼를 든 미군 14명이 합의 없이 나무를 자르다가, 중단 요구에 흉기를 휘두르며 먼저 폭행을 시도해 인민군이 자위적 조치를 취했다”고 선전했다. 이후 수십 년간 당 기관지·조선중앙TV 등을 통해 “미제가 판문점에서 전쟁 도발 구실을 찾기 위해 꾸민 계획적 도발”이라는 주장을 반복해 왔다.

‘폴 버냔 작전’… 나무 하나 자르려 총력 배치
사건 사흘 뒤인 8월 21일, 미군은 ‘폴 버냔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는 이례적인 무력 과시 작전을 감행했다. 미·한 합동부대 110여 명(그중 상당수는 태권도 무장 병력)이 공병 장비와 전기톱을 싣고 JSA로 진입해, 나무를 완전히 베어버리는 것이 임무였다.

하늘·바다·지상 모두 움직인 ‘나무 제거’
작전 당일, 하늘에는 괌에서 출격한 B-52 전략폭격기가 F-4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했고, 한국 공군 F-5·F-86, 미 공군 F-4E, 미 본토에서 온 F-111 폭격기까지 한반도 상공·주변에 대기했다. 지상에서는 UH-1·수송헬기와 코브라 공격헬기 20여 대가 공병부대를 엄호했고, 해상에는 항모 USS 미드웨이(Task Force)가 이미 한반도 근해로 전개한 상태였다. 나무 한 그루를 자르기 위해 사실상 미국의 ‘모든 전력 축’이 시위 차원에서 움직인 셈이다.

“개성 점령, 연백평야 진격까지 각본”
공개 문건과 당시 미측 관계자 증언에 따르면, 북한군이 나무 제거 작업을 방해할 경우 개성 점령과 황해도 연백평야까지의 공세 시나리오까지 검토돼 있었다. 실제 작전은 북한군이 무력 충돌을 자제하면서 약 40여 분 만에 미루나무를 6m 높이 그루터기만 남기고 잘라내는 선에서 종료됐다. 그러나 작전 직전까지 한반도는 DEFCON 단계가 격상된 상태였고, 워싱턴에서는 “이 나무가 제3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김일성의 ‘유감 표명’으로 급한 불은 진화
북한은 처음엔 강경 대응을 이어가다가, 미국의 압도적인 무력 과시에 직면해 톤을 낮췄다. 사건 발생 사흘 뒤, 김일성 주석은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를 통해 유엔군 사령관에게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북한 최고지도자가 공식적으로 표현한 이례적인 ‘유감’으로, 위기 확전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수습으로 평가된다. 같은 날 미루나무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이후 그 자리는 사건을 기념하는 그루터기와 표지로만 남게 됐다.

판문점 JSA 구조도 이 사건 이후 바뀌었다
도끼만행 사건 이전까지 JSA에는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하는 물리적 선이 없었고, 북측·유엔사 경비병들이 서로 쪽 건물 앞까지 자유롭게 이동했다. 1976년 이후 양측 초소는 남·북으로 분리됐고, 폭 약 50cm·높이 5cm의 시멘트 구조물이 MDL 위를 따라 설치되면서 ‘이 선을 넘지 않는’ 분할 경비 방식이 도입됐다. 현재 유엔사 경비대대의 전진기지인 캠프 보니파스(Camp Bonifas)와, 2024년 새로 지어진 ‘보니파스 & 배럿 막사’는 당시 희생된 두 미군 장교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북한 내부에선 ‘영웅 미담’으로 포장
뒤늦게 공개된 북한 매체 자료에 따르면, 김정일은 사건 이듬해인 1977년 판문점을 직접 방문해 도끼 사건에 참여했던 부대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이들 일부에게 공화국영웅 칭호를 내리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3년 북한 조선중앙TV는 ‘도끼사건의 주인공으로 영생하는 전사, 공화국영웅 홍성문’이라는 선전 영상을 방영하며, 사건 가담 병사를 체제 수호의 상징으로 영웅화했다. 북한 선전선동은 지금도 이 사건을 “판문점에서 미제의 도발을 격퇴한 승리”로 규정한다.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책임 전가’
북한은 2016년·2017년에도 판문점대표부 담화와 김일성대 역사학부 교원 인터뷰 등을 통해 “미군이 먼저 도끼를 휘둘렀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남북·북미 관계가 유화 국면이던 시기에는 공식 언급을 자제했지만, 대외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도끼만행 사건을 다시 꺼내 미국의 “전쟁 도발 행태”를 비난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군사적으로는 JSA 구조를 바꾼 계기가 됐고, 정치·선전 측면에서는 지금까지도 남북 간 ‘기억 전쟁’의 소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