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명이 공개된 유일한 국정원 순직 요원, 최덕근 영사
국가정보원 순직 요원 가운데 공식 실명이 공개된 사람은 단 한 명,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된 고 최덕근 영사다.
국정원은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숨진 19명의 순직 요원을 별로만 표시해 추모해 왔지만, 외교관 신분으로 근무하던 최 영사만은 예외적으로 이름과 약력이 공개돼 왔다.

블라디보스토크 계단에서 벌어진 정체불명의 피습
최덕근 영사는 주블라디보스토크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문화·교류 업무를 맡는 영사로 근무하던 중, 1996년 10월 1일 자택 아파트 계단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
머리를 여러 차례 둔기로 가격당하고 흉기에 찔린 상태로 현장에서 사망한 그는, 단순 강도 피해자로 보였지만 곧바로 정치·안보 사건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부검 결과 혈액에서 신경가스 계열 독극물인 네오스티그민 성분이 검출되면서, 우발 범행이 아니라 계획된 암살이라는 정황이 뚜렷해졌다.

북한 위폐·마약 네트워크 추적하던 중 표적이 되다
당시 한국 정보당국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최 영사는 겉으로는 문화·영사 업무를 맡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북한의 달러 위조·마약 밀매 조직을 추적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인근 나홋카 일대는 북한 선박·공작조가 자주 오가는 거점이었고, 위폐·마약이 제3국을 통해 유통되는 통로로도 지목된 지역이었다.
한국 당국은 이 수사 활동이 북한 정보조직의 표적이 되었고, 북한 측이 러시아 조직범죄 세력까지 동원해 암살을 실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 수사는 ‘강도살인’ 결론… 한국은 끝까지 이견 유지
러시아 수사당국은 2년여 수사 끝에 “정체불명의 괴한에 의한 강도·우발 범죄”라는 취지로 사건을 정리하려 했고, 범인은 특정되지 못한 채 미제 상태로 남았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외교관을 대상으로 한 계획적 독극물 살해”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북한 연루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당시 러시아 내에서도 “한국 외교관 피살 사건을 단순 강도로 치부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며, 수사 미진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다.

공소시효 만료 앞두고, 한국의 요구로 ‘시효 정지’ 조치
러시아 형법상 살인 사건 공소시효는 원래 15년이 적용돼 2011년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시효 정지와 재수사를 공식 요청했다.
러시아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공소시효 진행을 멈추고, 부검 기록·독극물 분석 등 기존 증거를 토대로 사건을 재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이 조치로 지금도 용의자가 특정되거나 새로운 증거가 확보될 경우, 러시아 내에서 수사를 재개할 법적 여지는 남아 있는 상태다.

‘이름 없는 별’ 사이, 유일하게 이름이 새겨진 이유
내곡동 국정원 청사에는 순직 요원을 상징하는 별 조형물이 설치돼 있지만, 대부분은 실명 없이 별의 개수(19개)로만 존재가 표시된다.
그러나 최덕근은 외교부 소속 공관원 자격으로 파견된 상태에서 피살됐고, 사건 자체가 국제 외교 문제로 공론화되면서 예외적으로 이름과 직함이 공개됐다.
이 때문에 그는 “국정원 블랙요원 가운데 유일하게 실명이 공적으로 기록된 사례”로, 내곡동 추모공간과 대전 현충원에 모두 이름이 남아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가장 먼저 찾은 이름, 최덕근
국정원을 방문한 역대 대통령들은 관례적으로 청사 내 순직 요원 추모공간을 참배하는데, 이 자리에서 최덕근 영사의 약력과 사진이 함께 소개되는 것이 통상적인 순서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역시 집권 기간 국정원 방문 때 ‘이름 없는 별’과 함께 최 영사를 직접 언급하며, 해외 공관에서 목숨을 잃은 정보요원의 희생을 기렸다.
이는 정보기관 개혁·통제와 별개로, 실무 요원들의 안전과 예우 문제를 국가 차원에서 어떻게 균형 있게 다뤄야 하는지를 상기시키는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졌다.

25주기 추모식, “진범 찾기 포기하지 않겠다”는 메시지
피살 25주기를 맞은 해, 국정원은 청사 보국탑 참배와 대전 현충원 방문, 온라인 추모관 개설 등 내부 추모행사를 열고 고인의 공적을 되새겼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는 “그간 확보한 증거와 정보를 러시아 측과 공유해 왔으며, 진범 규명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밝히며, 수사 포기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다른 이름 없는 요원들에게 보내는 약속’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는 해석이 뒤따랐다.

“유일한 실명 공개 요원”이 남긴 질문
최덕근 영사의 사례는, 정보기관 요원이 언제·어떤 조건에서 이름과 공적을 공식 기록에 남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익명성을 본질로 하는 정보 활동의 특성상 다수 순직자는 별 하나로만 기억되지만, 외교관 신분과 국제적 파장을 동반한 사건은 예외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동시에, 이름이 공개되지 못한 다른 순직 요원들까지 어떻게 공정하고 품위 있게 기릴 것인지가, 국정원과 한국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