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네시아가 비운 자리, 필리핀이 치고 들어왔다
KF‑21 보라매는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2010년대부터 공동개발한 4.5세대 다목적 전투기다. 애초 인도네시아는 개발비의 20%를 부담하고 기술 이전과 시제기 1대를 받는 조건이었지만, 2020년대 들어 분담금 납부가 반복적으로 지연되며 2025년 초 기준 약 1조 원에 가까운 미납이 누적된 상태다.
2025년 개정 협정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분담 비율은 7.5%로 낮아졌고, 지급 기간도 2030년대 중반까지 늘려 잡는 대신, 한국이 사실상 개발 주도권과 시제기를 모두 쥔 구조가 됐다. 이 공백을 가장 먼저 파고든 나라가 바로 필리핀이다.

필리핀, KF‑21 ‘우선 수출국’로 부상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폴란드 등 여러 나라가 KF‑21에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현재 가장 구체적인 협상 테이블에 올라 있는 국가는 필리핀이다. 2025년 서울 ADEX에서 KF‑21 시범비행을 지켜본 필리핀 공군 대표단은 KAI와 기술 제원, 금융 조건, 후속 정비·현지 조립 가능성까지 포괄하는 심층 협의를 진행했다.
방산 전문 매체들은 “필리핀을 KF‑21 우선 수출 고객(priority customer)으로 설정했다”는 한국 측 발언을 인용하며, 2026년 초 양국 간 양해각서(MOU) 체결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블록1부터 들여오고, 차차 키우는 ‘진화형 도입’
필리핀은 막대한 초기 비용을 한 번에 부담하기 어려운 만큼, 공대공 능력 위주의 KF‑21 블록1부터 먼저 도입해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다. 블록1은 공중 우세·요격 임무에 집중하고, 이후 블록2·3로 넘어가면서 정밀 지상공격 능력, 내부무장창, 스텔스 성능을 강화하는 구조다.
이는 과거 필리핀이 한국산 FFX‑I ‘호세 리살급’ 호위함을 최소 무장 상태로 먼저 들여온 뒤, 순차적으로 대공·대함 무장을 증설해 전력을 완성한 선례와 유사하다. 현재 알려진 시나리오에 따르면, 필리핀은 1차로 12대를, 장기적으로는 24대 수준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보기 드문 ‘쌍발+장거리 레이더’ 조합
KF‑21은 미국산 F414 엔진 2기를 장착한 쌍발 전투기로, 단발기보다 생존성과 추력이 높다. 한화시스템이 개발한 AESA 레이더는 500km급 탐지 능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IRST·전자전 장비와 결합해 동시 다수 표적 추적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여기에 유럽 MBDA의 미티어(Meteor)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이 통합되면, 동남아 공역에서 사실상 최상위급 공중 전투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미 라팔·스호이 계열기를 도입한 주변국들조차 “KF‑21+미티어 조합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F‑35 대신 KF‑21? 유지비·정치 리스크 줄인 선택
필리핀·말레이시아 같이 국방비와 외교 환경이 제한적인 국가는 F‑35 같은 완전 5세대 스텔스기 도입에 정치·재정 부담이 크다. KF‑21은 스텔스형 외형과 저피탐 설계, 디지털 센서 융합 등 4.5세대+급 성능을 지향하면서도, 가격·운영유지비를 F‑35보다 크게 낮춘 것이 특징이다. 한국 정부가 장기 저리 금융, 인프라 구축 지원, 부품 국산화·기술 이전 패키지를 함께 제안할 수 있다는 점도, 서방·러시아제 기체와 차별화되는 요소다.

말레이시아, FA‑50 이어 KF‑21 ‘동반 운용’에 눈 돌려
이미 FA‑50M 경전투기 18대를 한국에 발주한 말레이시아 역시, 중장기 다목적 전투기(MRCA) 사업에서 KF‑21을 유력 후보 중 하나로 올려놓고 있다. 공군 주력인 Su‑30MKM과 F/A‑18D 호넷은 노후화·부품 수급 난항으로 가동률이 떨어지고 있고, 쿠웨이트산 F/A‑18 중고기 도입도 지연되면서 전력 공백 우려가 커졌다.
말레이시아 군 관계자들은 “FA‑50과 같은 제작사·정비 체계를 쓰는 KF‑21은, 부품·훈련·MRO 측면에서 시너지가 있다”며, 2030년대 호넷·수호이 퇴역 시점에 맞춰 KF‑21 도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아직은 탐색 단계이지만, 필리핀 사례가 현실화되면 ‘FA‑50+KF‑21 패키지’가 말레이시아 공군의 미래 구상에도 깊숙이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인도네시아의 미납, 결과적으로 한국·필리핀에 호재
인도네시아는 KF‑21 공동 개발국 지위를 유지하겠다며 2024년 이후 재차 의지를 표명했지만, 미납 분담금과 F‑15EX·라팔 동시 도입 등 복수 노선을 택한 탓에, 한국 측 신뢰를 상당 부분 잃은 상태다.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가 받기로 했던 5호 시제기는 한국이 계속 보유하게 됐고, 양산 초도 물량과 시험 자산을 한국·우선 수출국에 우선 배정할 여지가 생겼다. 필리핀 입장에서 보면, 인도네시아의 지연 덕분에 자신들이 KF‑21 해외 첫 고객이 될 수 있는 ‘틈새’가 열린 셈이고, 한국으로서도 보다 확실한 구매 의지가 있는 동남아 국가로 눈을 돌릴 명분이 생긴 셈이다.

남중국해 공역에서 커지는 KF‑21의 억지력
필리핀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최전선 국가다. 세컨드 토마스 숄(아윤긴 암초) 보급 문제, 중국 해경·민병선과의 충돌 등으로 공군·해군 현대화 필요성이 급격히 커졌다.
KF‑21을 도입할 경우, 필리핀 공군은 전투행동반경 1,000km 이상급 쌍발 전투기와 장거리 레이더, 중거리 미사일을 바탕으로 남중국해·말라카해협 인근까지 ‘장거리 방공·요격’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전력 증강을 넘어, 중국·베트남·말레이시아 등과의 힘의 균형에서 “필리핀이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라, 공중전력의 핵심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