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육군 차세대 자주포, 결국 사업 취소
미국 육군은 1960년대 개발된 M109 계열 자주포를 개량·운용해 왔고, 현재 수백 대의 M109A6·A7 팔라딘이 현역에서 쓰이고 있다.
사거리·화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2018년부터 “장사거리 포병(ERCA)”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XM1299(나중의 M1299) 차세대 자주포를 개발했지만, 58구경장 장포신을 얹은 이 체계는 실사격 시험에서 총열 과도 마모, 목표 사거리 미달 등 기술적 난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미 육군은 2024년 예산에서 M1299 양산 전환을 포기하고 ERCA 자주포 시제품 사업을 공식 취소했다.

남은 건 노후 팔라딘…대규모 교체 과제
ERCA 취소로 미국 육군은 “70km급 초장사거리 포병” 계획을 다시 미사일·로켓 전력 중심으로 짜야 하는 상황이 됐다. 동시에, 이미 평균 수명이 상당히 지난 M109 계열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교체·개량할지에 대한 고민이 남았다. 미국군 전체로 보면 현역 M109 계열 숫자는 수백 대 단위이며, 동맹국·예비전력까지 합치면 700대 이상에 대한 대체 수요가 잠재적으로 거론된다.
미국은 M109A7(PIM) 업그레이드를 진행 중이지만, 장기적으로 유럽산·한국산 155mm/52구경 자주포들과 경쟁·협력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안’으로 주목받는 K9, 9개국이 이미 선택
이 공백에서 가장 주목받는 체계가 한국의 K9 자주포다. K9은 155mm/52구경 자주포로, 1998년 실전 배치 이후 터키·폴란드·핀란드·노르웨이·에스토니아·호주·이집트·인도 등 9개국에 수출되며 글로벌 표준급 자주포로 자리 잡았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옛 한화디펜스)가 폴란드에 공급하는 K9 패키지 계약만 최근 수년간 12조 6,000억 원 규모에 달하고, 이집트와의 계약도 2조 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베트남·루마니아 등 신규 수요까지 더해지며, K9 계열 수출 누적 계약액은 이미 10조 원 후반대로 확대되는 추세다.

성능·신뢰성 측면에서 미국이 원했던 스펙과 거의 일치
미 육군이 ERCA를 통해 노렸던 목표는 “기존 30km급 사거리를 70km까지 연장”하는 것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긴 58구경장 포신이 마모와 구조 부담을 견디지 못해 실패했다. K9은 52구경장 기준으로 일반탄 사거리 30km+, 사거리 연장탄으로 40km대 후반까지 입증된 체계로, 유럽·호주에서의 운용 결과 신뢰성과 유지보수 용이성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ERCA 취소를 다룬 국방 전문 매체들은, K9·PzH2000·아처 등 52구경 자주포들이 이미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성능을 검증받았고, 기술적으로 ‘적정선’에 도달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미국 현지 생산·기술협력” 시나리오와 한국의 협상력
현재 미국이 공식적으로 K9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미 의회·군사 싱크탱크 일각에서 “장기적으로 동맹국 솔루션을 도입해 M109 일부를 대체해야 한다”는 논의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025년 12월 미국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미 시장을 염두에 둔 K9 계열 현지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이 K9을 대량 도입한다면 단순 직도입보다는 미 방산업체와의 조립·생산 분담, 기술협력 형태가 유력한데, 이 경우 한국은 핵심 기술·포탑·사격통제체계 등은 자국에서 관리하면서, 라이선스 비용·부품 공급·정비 패키지 수익을 극대화할 ‘칼자루’를 쥐게 된다.

700대 가정 시 수조 원대 시장, 5조 원 효과는 보수적인 추산
미 육군이 장기적으로 700대 안팎의 자주포를 교체하고, 그중 상당수를 K9 계열로 채울 경우를 가정해보면, 1문당 가격(포·차대·포탄·훈련·군수 패키지 포함)이 100억 원 안팎일 때 총 계약 규모는 단순 계산으로 7조 원에 이른다.
여기에 이미 폴란드·노르웨이·호주·이집트 등에서 진행 중인 추가 물량·계열차량·업그레이드 계약까지 더하면, 글로벌 K9 프로젝트의 추가 시장은 수조 원 규모로 더 커질 수 있다. 따라서 “미국 포함 주요 동맹국들의 M109 계열 교체 수요를 상당 부분 K9이 흡수할 경우, 한국이 얻을 경제적 이익이 5조 원 이상”이라는 평가는 단지 과장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인 시나리오에 가깝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한미군·분담금과는 별개의 ‘기술 레버리지’
이런 구조는 주한미군 철수나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직접적으로 1:1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 포병 전력의 현대화 과정에서 “한국산 솔루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가까워질수록, 한국은 동맹 내에서 새로운 협상 수단을 하나 더 갖게 되는 셈이다.
과거에는 미국이 “분담금을 올리지 않으면 주한미군 감축·철수”를 카드로 꺼내 들었다면, 앞으로는 한국이 “우리 기술 없이는 당신들도 전력 공백을 피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던질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안보·경제를 동시에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주권’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조건: 금융·생산 능력·수출 관리
다만 이런 기회가 자동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K9 추가 수출·미국 진출을 위해서는 대규모 금융 지원(수출금융·보증), 장기 생산 능력 확보, 기술 유출 방지, 동맹국 간 이해 조정이 필수적이다. 이미 폴란드 2차 K9 계약에서도 한국수출입은행·무역보험공사가 대규모 금융 패키지를 뒷받침했듯이, 미국·루마니아·베트남 등 대형 프로젝트에서도 유사한 금융·정책 지원이 요구된다.
동시에, 핵심 설계·소프트웨어·사격통제 알고리즘 등은 철저히 국내에서 장악해, 장기적으로도 한국이 ‘원천 기술 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한미군 철수”보다 중요한 질문
결국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점은 “주한미군이 빠지느냐 마느냐”만이 아니라, “한국이 어떤 기술과 산업 기반을 갖고 동맹과 세계시장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가깝다. 미 육군이 차세대 자주포 개발에 실패하고, 여러 동맹국들이 K9을 선택한 현실은, 한국이 제대로 된 기술·산업 기반을 갖추면 동맹 구조 안에서도 충분히 ‘협상형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은, 결국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무기체계와 제조 능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기술이 있는 한, 방위비 분담·주한미군 문제에서도 한국이 일방적으로 끌려갈 이유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