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군인의 이름이 지워진 밤
1979년 12월 12일 밤, 서울 곳곳에서 총성이 이어졌지만 끝까지 반란군에 맞서려 한 장군의 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한때 박정희 정권 말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병주 소장은 계엄군 내부에서 드물게 내란 세력에 정면으로 저항한 인물로, 동료와 부하들에게는 ‘참군인’으로 통했다. 그러나 권력이 뒤집힌 뒤 그는 중상을 입고, 끝내 의문이 남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면서 대중의 기억에서도 점차 멀어져 갔다.

10·26과 12·12, 두 번 반복된 ‘술자리’의 그림자
1979년 10월 26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초대로 궁정동 안가에 들렀다가 차장보와 남아 포도주를 나누고 있었다. 김재규는 식사 도중 “대통령의 급한 호출이 있다”며 자리를 떴고, 이 장면은 훗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에게 내란 의혹을 씌우는 명분으로 악용됐다. 불과 45일 뒤 12·12 군사반란 당일, 전두환 자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잠재적 저항 세력인 장군들을 연희동 요정 술자리로 불러 모아 두고, 그 사이 정승화 연행과 권력 장악 작전을 진행했다.

정병주와 장태완, 내란 세력의 첫 표적
그날 연희동 자리에는 이후 내란군에 가장 강하게 맞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도 포함돼 있었다. 장태완의 회고에 따르면, 전두환 측은 12월 초부터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참석 여부를 확인할 정도로 집요했다. 반란 세력은 자신들을 제지할 가능성이 큰 인물들을 정확히 골라내 술자리로 묶어 두고, 정승화 체포와 대통령 압박, 수도 방위선 무력화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정병주는 회의장에서 서둘러 빠져나와 부대로 돌아가고, 이후 내란 세력의 최우선 공격 대상이 된다.

머리와 다리, 다시 팔까지… 몸으로 싸운 군인
1926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정병주는 육군사관학교 9기를 졸업하고 1950년 초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한국전쟁에 투입돼 전선에서 머리에 파편 부상을 입었다.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맡았을 때에는 직접 수십 차례 강하 훈련을 소화하다 주낙하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장기간 석고붕대와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진급 속도는 빨랐고, 1968년 준장, 1971년 소장을 단 뒤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거쳐 특전사령관에 올랐다. 군 경력의 앞뒤를 통틀어, 그는 몸을 아끼지 않고 최전선에서 움직이는 유형의 지휘관으로 기록된다.

문재인·노태우가 공통으로 남긴 ‘참군인’ 평가
정병주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비교적 한 방향을 가리킨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강제징집 후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특수전 훈련을 받으며, 폭파 과정 최우수상을 정병주에게 직접 수여받은 경험을 밝히고 그를 “참군인의 표상”이라고 표현했다. 9공수특전여단장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인간미 있는 사령관으로, 여단장들을 자주 모아 친목과 협조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회고해, 상·하를 막론하고 신뢰받던 지휘관의 면모를 전했다.

12·12 밤, 특전사에서 벌어진 결정적 몇 시간
12월 12일 저녁 정병주는 연희동 모임에서 전두환을 기다리다가, 정승화 연행 직후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약 한 시간 뒤 송파 거여동 특전사령부로 복귀했다. 그는 도착 직후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과 통화하며 상황을 공유했고, 곧바로 인천에 주둔한 9공수특전여단에 육군본부 방어 출동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3공수여단장과 차규헌 중장 등으로부터 “10·26 연루 혐의로 정승화를 연행했다, 협조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대응 태세를 유지했다.

김오랑의 희생과 정병주의 피격, 무너진 방어선
인천의 9공수특전여단은 준비 지연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서울로 출동을 시작했고, 거의 같은 시각 반란군은 특전사령부로 들이닥쳤다. 전두환은 밤 11시쯤 3공수여단장 최세창에게 정병주 체포를 지시했고, 특전사 집무실에는 소수의 무장 병력이 투입됐다. 내실로 통하는 문 앞에서 반란군이 M16으로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안쪽에서 몇 발의 응사 사격이 돌아왔고, 이 과정에서 반란군 일부도 팔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 두 번째 집중 사격 후 안쪽에서 소리가 멎자 문을 연 반란군은 김오랑 비서실장이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있고, 정병주 역시 팔에 큰 총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군복을 벗은 뒤에도 지킨 마지막 명예
여러 차례 전장에서 얻은 상흔에 더해 12·12 때 입은 총상까지 겹치면서, 군을 떠난 뒤 정병주의 몸과 마음은 모두 깊은 상처를 안게 됐다. 그는 가톨릭 신앙에 귀의해 불우이웃돕기 활동에 나섰고, 해마다 12월 12일이면 국립현충원의 김오랑 묘를 찾아 울음을 참지 못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전두환 정권은 12·12의 부정적 흔적을 희석하기 위해 정병주에게 공직을 제의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장성은 군복을 벗은 뒤에도 명예를 지켜야 한다”며 이를 거듭 거절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취직하는 날부터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기억한다.

민주화 국면에서의 반격, 그리고 의문 속 죽음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정권이 큰 타격을 입고, 노태우가 집권 여당 후보로 나선 시기에는 정병주에게 조심스러운 정치적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12·12를 “하극상”이라고 규정하고, 노태우의 정치적 정통성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 이후 여소야대 국면이 만들어지며 군부 세력에 대한 압박이 커졌지만, 정병주의 행보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1988년 말 실종된 뒤 1989년 3월 경기도 양주 인근 야산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됐다.

잊힌 참군인을 다시 부르는 이유
내란 세력을 향해 총부리를 돌린 지휘관들 가운데 장태완, 정병주, 그리고 김오랑의 이름은 여러 조사와 기록 속에서 부분적으로 복원됐지만, 여전히 쿠데타 주역들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고 보긴 어렵다. ‘참군인’이라는 표현이 남긴 울림과 달리, 그의 이름이 대중의 기억 속에서 주변부에 머무는 현실은 “역사적 책임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정병주의 삶을 다시 꺼내 보는 일은 한 사람을 추모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권력이 바뀔 때마다 군이 헌법과 국민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되묻는 과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