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 위협에 징병제 되살리는 유럽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자, 유럽 주요국은 국방비 증액과 함께 병력 확대에 직접 나섰다. 냉전 종식 이후 모병제·전문 직업군 위주로 전환했던 나라들이 다시 징병제·유사 징병제를 꺼내 든 것이다. 뉴욕타임스와 유럽 언론에 따르면, 프랑스·독일은 ‘자발적 군복무제’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준(準)징병제 틀을 마련했고, 크로아티아·라트비아·세르비아 등은 이미 징병제 복귀를 공식화했다.

프랑스, 29년 만에 군복무제 부활
프랑스는 1997년 징병제를 폐지한 뒤 20만 명 안팎의 상비군을 직업군인으로 유지해 왔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 정도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6년 중반부터 시행할 ‘자발적 군복무제(SNU 확장형)’ 도입을 발표하며 18~19세 청년 1만~5만 명을 대상으로 10개월간 군 복무·기초훈련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름은 ‘자발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지원자가 부족할 경우 강제 징집까지 염두에 둔 구조여서 사실상 징병제 복귀를 위한 제도적 발판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프랑스는 동시에 냉전 종식 후 최대 수준인 827억 유로(약 141조 원) 규모 국방예산도 확정하며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

독일·폴란드·크로아티아…“필요하면 언제든 징병”
독일은 2011년 징병제를 중단한 뒤 모병제로 전환했지만, 최근 병력 부족과 러시아발 안보 우려 속에 ‘선택적 징병제’ 구상을 내놨다. 독일 국방부가 마련한 병역법 개정안은 평시에는 지원병 위주로 운영하되, 안보 위기 시 의회 의결만으로 일정 연령층을 의무 복무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폴란드는 예비전력을 크게 늘리기 위해 모든 성인 남성에게 기본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고, 크로아티아·라트비아 등 러시아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은 이미 10여 년 만에 징병제를 공식 부활시켰다.

여성 징병까지 꺼낸 덴마크·스위스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여성 징집으로 영역을 넓히는 국가도 늘고 있다. 덴마크는 2025년 7월 1일부터 남성뿐 아니라 만 18세 여성도 징병 추첨 대상에 포함하는 법을 시행했고, 의무 복무 기간 역시 4개월에서 11개월로 대폭 늘렸다. 기존에는 남녀 모두 지원병으로 받고 부족 인원만 남성 대상 추첨으로 채웠지만, 앞으로는 여성도 동일한 조건으로 징집 대상이 된다. 노르웨이·스웨덴·네덜란드 등은 이미 2010년대부터 남녀 모두를 징집하는 제도를 도입했으며, 영세 중립국 스위스도 여성 의무복무 확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등 ‘여성도 군대 가는 유럽’이 서서히 현실이 되고 있다.

“첨단 무기 있어도 사람 없으면 끝”이라는 유럽의 메시지
유럽이 일제히 병력 확대에 나선 배경에는, 드론·정밀유도무기·사이버전이 전쟁 양식을 바꾸고 있음에도 “결국 영토를 지키고 점령하는 것은 보병”이라는 냉정한 현실 인식이 자리한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양측 모두 막대한 무인기·미사일을 투입했지만, 도시·참호·지하시설을 확보하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여전히 보병과 기계화보병이 투입되고 있다. 프랑스·독일 정치권에서도 “최첨단 무기가 있어도 그 장비를 운용하고 전선을 유지해 줄 사람이 없으면 억제력은 붕괴한다”는 발언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한국군, ‘필요 50만’ vs ‘현실 45만’
한국군 상황은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국회·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군 상비병력은 2019년 약 56만 명에서 2025년 7월 기준 약 45만 명 수준으로 줄어, 전문가들이 ‘정전 상황 최소 필요 규모’로 보는 50만 명을 5만 명이나 밑돈다. 같은 기간 육군 병력은 3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10만 명 이상 감소했고, 현역 판정률을 70%대에서 80%대 중반으로 올렸음에도 감소세를 막지 못했다. 미군 전술교리에서 방어작전 시 적군 대비 1대3, 공격작전 시 3대1 이상 병력 우위를 요구하는 ‘최소계획비율’을 적용하면, 약 120만 명 수준인 북한군 병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최소 50만 명의 상비군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적이 많다.

“기술·아웃소싱으로 메운다”는 한국, 현실성 있나
병력 감소 우려가 제기될 때마다 우리 군 당국은 “첨단 기술·무인전력·민간 인력 아웃소싱으로 보완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실제로 국방부는 전투병 중심 35만 명 안팎의 현역과 군무원·상비 예비군·민간 위탁 인력을 조합해 ‘작전 가능 전력’을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관공서 경비·급식·정비처럼 비전투 분야 일부는 외주화로 대체 가능하지만, 최전방 전투와 점령·경계 임무까지 기술·아웃소싱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착각”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사람 없는 첨단 군대’의 한계
전문가들이 특히 우려하는 부분은, 첨단 무기를 운용할 사람조차 줄어드는 구조다. 고성능 레이더·지휘통제체계·전술데이터링크·무인기·사이버전 장비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적지 않은 수의 고급 인력을 장기간 숙련시켜야 하는데, 병력·간부 수가 줄어들수록 오히려 이런 첨단 체계 운용 여력이 떨어질 수 있다. 유럽이 러시아 위협 속에서 “병력과 기술 둘 다”를 늘리는 방향으로 가는 반면, 한국은 “병력은 줄이고 기술로 메운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유럽이 보여주는 ‘불편한 거울’
러시아 위협 앞에서 징병제·여성 징집·예비역 동원 체계를 손보는 유럽의 모습은, 한편으로 한국 안보에 불편한 거울을 들이대고 있다. 지리적으로 러시아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은 나라들조차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라며 병력 풀을 넓히는 상황에서, 정전 상태로 북한과 마주한 한국이 최소 필요 병력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당연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첨단 무기·기술군 전환이 필수인 것은 맞지만, 결국 그 장비를 현장에서 운용하고 땅을 지키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유럽의 재무장 움직임은 거꾸로 한국에 상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