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인데 더 늘어난 억만장자

포브스와 여러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의 달러 억만장자 수는 침공 직전인 2021년 123명에서 2024년 125명으로 되레 증가했고, 2024년 기준 포브스 세계 부자 순위에 오른 러시아 억만장자는 120명으로 전년보다 15명, 2022년보다 37명 늘었다. 전쟁 첫해 제재로 총자산이 급감했지만, 2023~2024년 국방비·전쟁 관련 지출이 폭증하면서 에너지·방산·물류 등 ‘전쟁 산업’에 얽힌 재벌들의 자산이 크게 회복·증가했다. 2024년에는 새 억만장자 19명이 등장해, 연간 신규 부자의 수로도 전례 없이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돈은 늘었지만, 권력은 줄었다

숫자만 보면 러시아는 세계 주요 경제권 가운데서도 ‘억만장자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러시아 재벌들의 총자산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27%로, 인도와 미국보다도 높다는 분석이 있다. 그럼에도 푸틴 집권 이후 올리가르히들은 국정 결정에 개입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했다는 것이 서방·러시아 독립 연구자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처럼 정권에 도전한 인물은 투옥·재산 몰수·기업 국유화를 당했고, 이후 러시아 대기업 총수들은 공개적으로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는 행위를 스스로 금기시하게 됐다.
서방 제재가 만든 ‘탈출 불가능한 우리 안’

서방은 전쟁 이후 러시아 재벌들의 해외 자산을 동결하고, 계좌·부동산·요트·사치재를 제재 목록에 올렸다. 겉으로는 푸틴을 압박하려는 조치였지만, 결과적으로 억만장자들이 서방으로 ‘돈과 함께 이탈’할 통로를 크게 줄여 버리는 효과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러시아 문제 전문가들은 “자산이 묶이고 이동성이 막힌 상태에서 서방이 이들에게 제공한 현실적인 출구 전략은 없었다”며, 제재가 역설적으로 푸틴이 부자들을 러시아 내부에 묶어 두고 전쟁 경제에 동원하기 쉽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줄 잘 선 사람은 더 부자가 됐다

전쟁 기간 나타난 뚜렷한 패턴은 ‘줄을 잘 선 재벌’과 그렇지 않은 재벌 간 격차다. 포브스 자산 집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러시아 억만장자 절반 이상이 군수 물자 공급·에너지·물류 등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업을 통해 이익을 보거나,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푸틴은 충성도를 보이는 기업·재벌에게는 국영 프로젝트·군납 계약·에너지 인허가 등을 열어주고, 제재로 비워진 틈새 시장을 우선 배분하는 ‘당근’을 제공해 왔다. 반대로 정치적 발언이나 서방 우호 행보를 보인 인물들은 세무조사·사법 처리·국유화 위협 등 ‘채찍’을 통해 시장에서 축출되거나 해외로 밀려났다.
“미친 전쟁” 한마디에 90억 달러를 잃은 사람

전직 은행 재벌 올레그 팅코프는 이 ‘채찍’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는 2022년 인스타그램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미친 전쟁”이라고 비판하는 글을 올렸고, 다음 날 크렘린 측이 은행 경영진에게 연락해 “팅코프와의 연계를 끊지 않으면 국유화하겠다”고 압박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팅코프는 자신이 세운 러시아 2위권 인터넷은행 ‘팅코프 은행’ 지분 35%를 블라디미르 포타닌 계열 인터로스 그룹에 넘겼는데, 그는 이후 “실제 가치의 3%에도 못 미치는 헐값에 강제로 팔았다”며 약 90억 달러 자산을 잃었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를 떠나 서방으로 이주했고, 공개적으로 푸틴 체제와 거리를 두고 있다.
남은 부자들은 왜 조용한가

호도르콥스키나 팅코프 같은 사례를 지켜본 러시아 재벌 다수는 전쟁과 정치에 대해 공개 발언을 자제하며 ‘침묵’ 전략을 선택했다. 전쟁을 공개 비판하면 자산과 기업을 잃을 위험이 크고, 서방 제재로 해외에 안전하게 자산을 옮길 통로도 막힌 상황에서, “조용히 체제에 협력하며 사업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위험이 적은 선택지가 됐다는 분석이다. BBC와 여러 분석에 따르면, 전쟁 이후 공개적으로 전쟁을 비판한 러시아 대기업 총수는 손에 꼽히며, 대부분은 크렘린과 일정 관계를 유지한 채 국영·군납 사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적응했다. 결국 푸틴은 제재·전쟁·국내 법·사법권을 동시에 활용해, 재벌들을 정치적 라이벌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체제에 종속된 자본”으로 재구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