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만든 법이 싫다면 국민이 직접 바꾼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결정조차 국민이 돌려세울 수 있는 나라’로 불린다. 정치학 교과서에서 직접민주주의의 교과서적 사례로 등장하는 스위스는 국회의 입법이나 정부 정책이라도 국민이 반대 서명을 모아 국민투표를 발의하면, 과반 찬반으로 결과가 뒤집힌다.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 권력의 마지막 브레이크를 쥐고 있다는 뜻이다. 이 제도는 단 한 세대라도 국민의 정치 효능감이 끊기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00일 안에 5만 명 서명 모으면 국민투표로 폐기
스위스 정치의 기본축은 국민발안(Initiative)과 국민투표(Referendum) 두 가지다. 국민발안은 시민 10만 명의 서명을 모으면 헌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직접 부칠 수 있는 제도다. 의회가 반대하더라도 국민 다수가 찬성하면 헌법은 바로 바뀐다. 국민투표는 반대로 정부나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시민이 되돌릴 때 쓰인다. 법 통과 100일 안에 5만 명의 서명을 모아 국민투표를 요구하면, 투표 결과 과반이 반대할 경우 해당 법은 즉시 폐기된다. ‘의회가 국민 위에 있지 않다’ 는 점이 스위스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공짜 돈 싫어요” 2016년 스위스 국민의 선택
2016년 스위스 국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결정을 내렸다. 모든 성인에게 매달 약 300만 원(2,500스위스프랑)을 조건 없이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77%가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대부분의 외신은 “부자 나라니까 당연히 찬성하겠지”라 예상했지만, 스위스 시민들은 “복지가 과도하면 노동의욕이 사라지고 국가 재정이 무너진다”며 스스로 혜택을 거부했다. 이 사례는 ‘정치의 주체로서 국민이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스위스형 시민정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

정부와 의회보다 강한 시민의 브레이크
스위스에서는 국회의 다수 의석으로도 정책을 강행하기 어렵다. 정부는 법안을 만들 때마다 곧바로 ‘국민투표에 걸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설계한다. 이로 인해 포퓰리즘이 작동하지 않고, 각 정당이 타협과 설득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치문화가 뿌리내렸다.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연방 각료 7명은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 배분되고, 의회와 행정부는 정책을 추진하기보다 ‘시민 합의’를 관리하는 역할에 가깝다. 얼마나 설득력 있게 설명하느냐가 선거보다 더 중요한 정치 문화가 됐다.

650회 넘는 국민투표, 생활 속 정치문화
1848년 연방헌법 제정 이후 스위스에서는 650회가 넘는 국민투표가 열렸다. 연평균 3~4회꼴이다. 세금 조정, 중립 외교, 동성결혼, 환경세, 이민 정책 같은 국가 중대 사안이 모두 전국 투표로 결정된다. 투표 전에 정부는 모든 법안의 찬반 근거, 예산 영향, 지역별 편익을 분석한 안내책자를 전 국민에게 배포하며, 유권자는 각자의 판단으로 우편이나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투표한다. ‘투표일은 공휴일’이 아니지만, 투표율은 50% 안팎으로 유지된다. 정치 참여가 ‘희귀한 행사’가 아닌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시민교육이 만든 ‘민주주의 내공’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은 시민의식과 지방분권이다. 국민은 초등학교 때부터 정치 토론과 모의 투표를 배우며, 지방 자치단체가 교육·복지·교통 등 대부분의 정책을 스스로 결정한다. 각 주와 마을이 조세권을 가지고 있어, 주민들은 자치 단위 예산을 직접 관리하고 세율과 공공요금을 스스로 정한다. 일상적인 정치 참여가 곧 사회 교육의 연장선이 된 셈이다.

국민이 진짜 ‘최고 권력자’인 나라
스위스에서는 권력의 정당성이 ‘정당’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투표함’에서 나온다. 정부가 만든 법은 시민의 동의 없이는 지속될 수 없고, 국민이 원하면 바로 사라진다. 정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이 아니라,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다. 이런 제도 아래서 스위스는 사회적 갈등이 적고, 국가신뢰도가 70% 이상으로 OECD 상위권을 유지한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는 “국민이 불만을 말하는 나라가 아니라, 직접 바꾸는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