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의 ‘관세 칼날’ 속 살아남은 말레이시아
트럼프 행정부는 1기 집권 당시부터 동맹·비동맹을 가리지 않고 대중국 무역적자와 공급망 의존도를 명분으로 관세를 올렸고, 2기에서도 ‘공정 관세’를 내세워 동맹국 제품에도 10~25%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공개적으로 검토해 왔다. 이 과정에서 철강·자동차·배터리·반도체 완제품을 수출하는 한국·일본·대만·인도는 관세 인상 타깃에 올랐지만, 희토류·반도체 패키징·데이터 인프라를 앞세운 말레이시아는 일부 품목에서 관세 인상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되거나 낮은 세율을 유지하는 ‘우대국’ 입지를 확보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측은 말레이시아를 “핵심 광물과 첨단 제조를 겸한 공급망 허브”로 규정하며, 단순 생산기지가 아니라 전략 파트너로 다루는 기조를 분명히 하고 있다.

희토류·핵심 광물, 중국 의존 줄이는 대체 공급선
미국은 반도체·전기차·방산·재생에너지 산업의 필수 요소인 희토류·니켈·주석 등 핵심 광물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 말레이시아는 역사적으로 희토류 정제 및 관련 화학 공정을 수행해 온 국가로, 미·중 경쟁 심화 이후 미국·호주·일본 기업들이 대체 생산 거점으로 주목해 온 지역이다. 실제로 미국·말레이시아·다른 우방국이 참여하는 광물 협력 포럼과 MOU를 통해, 희토류·주석·니켈 정제 및 장기 공급 계약이 논의되고 있으며, 일부 미국계·유럽계 자원 기업이 말레이시아 광산·정제 시설에 투자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무기화할 경우를 대비해, 동남아에 “우회 공급로”를 확보해 두는 것이 관세 완화의 대가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디지털세 멈추고, 빅테크에 길 터준 쿠알라룸푸르
미국 정부와 실리콘밸리는 각국의 ‘디지털 서비스세(소위 구글세)’를 강하게 문제 삼아 왔고, 실제로 프랑스·영국·인도 등의 디지털세 도입은 양자 통상 마찰로 이어졌다. 반면 말레이시아는 글로벌 디지털세 흐름 속에서도 미국 IT 기업과의 협의를 거쳐 독자 디지털세 도입을 유보하거나 조정하고, 대신 데이터센터·클라우드 인프라 투자 유치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미국계 클라우드 기업은 말레이시아에 수십억 달러 규모의 데이터센터·리전 구축 계획을 발표했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세제 인센티브와 규제 완화를 묶은 패키지로 이들을 끌어들이며 ‘동남아 데이터 허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처럼 세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 빅테크와 장기 투자·일자리 창출을 맞바꾼 선택이, 관세·투자 협상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자본 일부 막고, 미국 기업에 광산 문 연 전략적 줄서기
말레이시아는 전통적으로 중국과 경제 관계가 깊었고, ‘일대일로’ 인프라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왔다. 그러나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일부 광물·에너지 분야에서 중국 국영기업의 신규 투자·지분 확대에 제동을 걸고, 같은 부문 채굴권·지분을 미국·호주·일본 계열 기업에 개방하는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투자 다변화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핵심 광물 안보 파트너십’ 구상에 말레이시아가 보다 선명하게 참여하는 행보로 받아들여진다. 워싱턴의 입장에서는 중국 기업의 광물 지배력을 줄이고 미국·우방계 기업에 접근권을 열어준 국가에 관세·투자 측면의 보상을 제공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고, 말레이시아는 이 구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동남아 국가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관세는 벌이 아니라 협력의 결과”라는 메시지
트럼프는 1기 때부터 “관세는 적대 행위가 아니라 협상을 위한 지렛대”라고 주장해 왔고, 2기에서도 관세 인상을 양보와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것임을 시사해 왔다. 말레이시아 사례는 이 논리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예다. 자원·세제·외교 노선에서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제 조정을 해준 대가로, 말레이시아는 관세 0% 또는 낮은 세율, 그리고 10%대 후반에서 20%대에 이르는 미국의 직접투자 증가율을 확보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반대로 관세 인상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자원·세제·정치·안보 측에서 뚜렷한 ‘보상 카드’를 내놓지 못한 다른 동맹국들은, 트럼프식 협상 구조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 워싱턴 외교·통상가의 대체적 시각이다.

한국·일본·대만이 읽어야 할 신호
말레이시아가 보여준 것은 “안보 동맹이냐 아니냐”보다 “미국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실물·정책 자산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세·투자·동맹 지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현실이다. 한국·일본·대만은 반도체·배터리·조선·자동차 등에서 이미 미국 공급망에 깊게 얽혀 있지만, 미·중 경쟁 심화와 트럼프식 관세 압박 속에서 자국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떤 ‘협상 카드’를 쥘지에 대한 전략적 계산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희토류·배터리 핵심 광물, 디지털세·데이터 규범, 방산·기술 동맹 등에서 어느 선까지 미국에 맞추고 어디서 자율성을 유지할지에 따라, 앞으로의 관세·투자·안보 지형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을 말레이시아 사례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