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위기에서 AI 핵심 기업으로

SK하이닉스의 뿌리는 1980년대 현대전자 반도체 사업부로,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메모리 공급 과잉이 겹치면서 막대한 부채와 적자를 견디지 못해 채권단 관리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사명이 ‘하이닉스’로 바뀌었지만, 한동안 매각·청산설이 끊이지 않을 만큼 위태로운 시기를 보냈다. 전환점은 2012년 SK그룹 인수였다.
SK는 통신·에너지 중심 구조에 반도체를 새 성장축으로 더하기 위해 대규모 설비 투자와 R&D를 지속했고, 수평적 소통·전문경영 중심의 문화로 체질 개선을 추진했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D램에서 삼성전자에 이은 글로벌 2위 메모리 업체로 자리잡았고, 데이터센터·모바일·PC 메모리 전 분야에서 존재감을 넓혔다.
HBM 1위, “AI 시대 돈 버는 포인트를 잡았다”

AI 모델과 GPU 수요가 폭발한 2020년대, GPU 옆에 붙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사실상 모든 AI 서버의 필수 부품이 됐다. SK하이닉스는 HBM2E 시절부터 조기 투자와 양산 경험을 쌓아 2025년 2분기 기준 HBM 출하량 점유율 62%로 시장 1위를 기록했다. 미국 마이크론이 21%, 삼성전자가 17%로 뒤를 잇고 있어, 세 회사가 사실상 글로벌 HBM 시장을 과점하는 구도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등 주요 GPU 업체에 HBM3·HBM3E를 공급하며 “엔비디아가 가장 먼저 찾는 메모리 파트너”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12단 적층 HBM3E의 높은 수율과 성능 덕분에 고마진 구조를 확보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업이익 9조 돌파, 10조 시대를 눈앞에 두다

HBM과 서버 D램 호황은 실적에 직결됐다. SK하이닉스는 2025년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22조 2,000억 원대, 영업이익 9조 2,000억 원대를 기록하며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발표했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약 68% 증가했고, 영업이익률은 40%를 웃도는 수준으로, 메모리 업황 호황기였던 이전 사이클을 훌쩍 넘어섰다는 평가다.
증권가에서는 HBM3E 비중 확대와 메모리 가격 강세를 반영할 경우 2025년 하반기나 2026년 초 분기 영업이익이 10조 원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AI 서버용 D램·HBM 비중이 전체 메모리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면서, SK하이닉스는 “AI 붐의 최대 수혜 메모리 회사”라는 타이틀을 사실상 굳혔다.
‘K-HBM’ 동맹과 삼성·마이크론의 추격

현재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마이크론이 빠르게 점유율을 늘리며 2위로 올라섰고, 삼성전자가 3위로 내려앉은 ‘3강 체제’다. 삼성은 2024~2025년 초 HBM3E 인증 지연과 수율 문제 등으로 엔비디아 공급에서 난항을 겪으면서 점유율이 40%대에서 10%대 중반으로 급락했다.
다만 시장조사기관들은 2025년 말~2026년 삼성의 HBM3E 본격 공급과 HBM4 출시가 시작되면 삼성 점유율이 30%를 넘기며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고, 그 과정에서 ‘K-HBM’(SK하이닉스·삼성)과 미국 마이크론 세 업체가 글로벌 HBM 시장의 95% 안팎을 과점하는 구조가 강화될 것으로 전망한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선두를 지키기 위해 HBM4 개발 속도, 패키징 기술(CoWoS 등) 경쟁력, 엔비디아·AMD·인텔 등과의 파트너십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관건이다.
최태원의 장기 베팅과 AI 데이터센터 ‘200조 시대’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인수 초기부터 메모리를 단기 시황에 휘둘리는 업종이 아니라, 파운드리·시스템 반도체와 함께 그룹의 핵심 성장축으로 키운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메모리 가격이 바닥을 쳤던 침체기에도 이천·청주 팹 증설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해외 생산거점 투자 등을 이어가며 “사이클 역행 투자”를 단행한 것이 현재 HBM 호황을 선점한 배경으로 꼽힌다.
글로벌 차원에서 보면, 데이터센터와 AI 인프라 투자 규모는 2024년 4,300억 달러 수준에서 2029년 1조 1,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있어, 이를 원화로 환산하면 AI 데이터센터·서버 관련 시장만 1,200조 원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중 상당 부분이 GPU, AI 가속기, 고대역폭 메모리, 고성능 낸드 수요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SK하이닉스의 성장 스토리는 단기 호황을 넘어 구조적 성장 단계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기술 패권 경쟁 속 SK하이닉스의 과제

AI 인프라 확대와 함께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 미국과 유럽의 공급망 재편 압박도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 CHIPS법, 유럽 반도체법 등 각종 인센티브·규제를 고려하며 생산기지와 투자 계획을 조정해야 하고, 중국 시안·우시 공장 등 기존 자산과의 균형도 맞춰야 한다.
동시에 마이크론과 중국 업체들이 HBM 후발 주자로 추격하는 상황에서, HBM4·HBM4E, 고대역폭 낸드, 패키징 통합(CoWoS, 3D 패키지) 등 차세대 기술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부도 위기에서 글로벌 메모리 2위, HBM 1위로 올라선 SK하이닉스가 앞으로도 “분기 영업이익 10조 원”이라는 상징적 숫자를 넘어, AI 시대 반도체 패권의 핵심 축으로 남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