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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상황에서" 유일하게 전두환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 군인'

aubeyou 2025. 12. 13. 12:41

전두환 쿠데타에 맞선 군인, 장태완

12·12 군사반란 한복판에서 “군인은 어디 편에 서야 하는가”를 몸으로 답한 사람이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다. 전두환의 시나리오 속에서 그는 단순히 술자리 손님 정도로만 계산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을 끝까지 몰아붙인 거의 유일한 현역 지휘관이었다. 12·12가 단순한 하극상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반혁명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장태완의 선택은 실패한 작전이 아니라 민주주의 편에 선 군인의 결단으로 봐야 한다.

반혁명에 맞선 선택

12·12는 부마항쟁·박정희 피살 이후 열리려던 민주화의 문을 다시 닫으려 한 군사반란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한 ‘특수수사’처럼 포장됐지만, 실제 내용은 군부 사조직 하나회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무력 행동이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방향으로 흐르던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 했다는 점에서, 당시 군 지휘부는 어느 쪽에 설지 선택해야 했다. 다수는 눈을 감거나 눈치를 봤고, 일부는 반란 측에 섰지만, 장태완은 서울 한복판에서 반란군과 정면충돌을 택했다.

전두환 시나리오를 깨버린 ‘예상 밖 변수’

거사 당일 전두환은 장태완과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연희동 고급 요정에 불러 술자리를 만들고, 그 사이 정승화를 체포하는 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다. 하지만 정승화 연행 소식을 들은 장태완은 곧장 요정을 뛰쳐나와 수경사로 복귀했고, 도착 직후부터 전차·병력을 동원해 반란군 진압 준비에 들어갔다. 그가 출동시킨 전차들이 시청 쪽으로 기동하면서, 경복궁 인근 반란군 지휘부까지 진동이 전해져 “정말 탱크를 끌고 오는구나”라는 말이 나왔다는 회고가 남아 있다. 장태완은 장교들을 모아 반란 주도 세력에 대한 체포·사살 명령까지 내리며, 그날 밤 반란 세력이 가장 두려워한 변수로 떠올랐다.

유신 체제의 군인이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지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애초부터 반독재 인사가 아니었다. 유신 체제가 한창 공고해지던 시기에 준장으로 진급해 수도경비사 참모장을 지냈고, 군 내부에서 체제를 떠받치는 위치에 있었다. 베트남전 참전, 향로봉 전투 등 한국전쟁과 해외 파병을 두루 겪은 전형적인 엘리트 장교였다. 다만 정보부대는 군사 정보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민간인 사찰·정치 개입을 싫어하는 등, “군은 정치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군이 정권 탈취에 나선 순간 이를 ‘넘지 말아야 할 선’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세 번의 전쟁을 통과한 전투형 장교의 판단

장태완은 한국전쟁에서 소대장·중대장으로 최전선에 서 있었고, 향로봉 전투 같은 격전지에서 결사대 장교로 투입됐다. 이후 베트남전에 파병된 맹호부대 부연대장으로 참전해, 정글전과 대규모 작전을 경험했다. 두 차례의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장교에게, 1979년 겨울 서울에서 벌어진 총성은 세 번째 전쟁에 가까웠다. 다만 이번에는 적이 외국군이 아니라 같은 군복을 입은 동료들이었고, 그 지점에서 그는 총구를 국민·헌법 쪽에 돌릴지, 권력 야망 쪽에 돌릴지를 선택해야 했다.

패배한 지휘관이 아니라, 역사 속 ‘승자’

결과만 보면 전두환은 쿠데타에 성공했고, 장태완은 새벽에 체포되어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패자가 됐다. 그러나 이후 역사의 흐름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 전두환은 법정에 서고 사망 후에도 유해를 어디에 둘지를 두고 논쟁의 대상이 된 반면, 장태완은 “군인은 헌법과 국민 편에 서야 한다”는 원칙을 지킨 상징적 인물로 자리 잡았다. 완전한 민주화 운동가였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결정적인 날 밤에 군복 입은 시민으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줬다는 점에서, 역사는 그를 패자가 아닌 ‘승자’ 쪽에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