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번 공격에도 안 뚫렸다”는 전설의 요새, 삼년산성의 진짜 위상

충북 보은 오정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년)에 공사를 시작해 약 3년 만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3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해서 삼년(三年)이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는 국가 사적 제415호로 지정돼 신라 산성 연구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인터넷에서 흔히 퍼지는 ‘150번 공격, 단 한 번도 안 뚫린 요새’라는 표현은 과장 섞인 전설에 가깝지만, 전략적 중요성과 견고한 축성술만큼은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수준이다.
포곡식 석축 산성, 성벽만 최대 20m

삼년산성은 오정산 정상부를 둘러싼 포곡식 석축 산성으로, 능선 전체를 타고 둘레 약 1.7km를 감싸는 구조다. 성벽 높이는 최대 20m, 폭은 8~10m에 달하며, 내·외벽을 따로 쌓고 그 사이를 잡석으로 채우는 이중 축조 방식이 확인됐다. 성벽 바깥쪽은 경사를 따라 곡선과 직선이 반복되는 ‘곡성(曲城)’ 형태로 구성되고, 성 모서리·취약 지점에는 돌출된 치성(雉城)을 배치해 사각지대를 줄였다.
성 위에는 적의 접근을 감시·공격하는 여장(女牆, 흉벽)이 설치돼 있었으며, 동·서·남문 주변에는 방형 또는 곡선형 옹성(甕城)과 차단벽 흔적이 확인돼 입체적 방어 구조를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삼년산성은 6세기 신라 북진 과정에서 축성술이 본격적으로 석축·입체방어 단계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대표 성곽으로 꼽힌다.
소백령·보은 일대 방어하는 ‘천연 요새’

입지 자체도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삼년산성은 소백산맥 줄기 중 하나인 오정산 능선에 위치해, 한반도 내륙을 동서로 잇는 교통 요충지인 속리산–보은–충주 라인을 감제하는 위치에 있다. 성 안에서 내려다보면 주변 평야·도로·고갯길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고대 신라가 백제·고구려와 대치하던 시기에는 북진로 방어와 내륙 통제의 핵심 거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발굴 조사에서 산성 내부에서는 대형 저수시설·우물·창고터·주거지 등이 확인돼, 단기 주둔이 아닌 장기 방어·지휘 기능을 염두에 둔 군사 행정 기지였음을 시사한다.
‘동문 Z자형 진입로’와 살상 설계

삼년산성이 “요새 설계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성문 구조다. 동문 외부는 단순 직선 통로가 아니라, 성벽을 따라 지그재그로 꺾이는 Z자형 진입로가 확인된다. 이런 구조는 성문을 향해 접근하는 적을 긴 시간 노출시키고, 성벽 위와 측면 치성에서 쏟아지는 화살·투석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전형적 방어 설계다.
일부 구간에는 문 앞으로 바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보조 성벽·담장을 덧대는 이중 차단 구조도 보인다. 성문 주변에 연못이나 수구(水口)를 겸한 저수공간이 배치되어 공격 시 기습 화공·물길 조절 같은 방어술에 활용되었을 것이란 분석도 제기된다. 이 때문에 지역 전승에서는 “삼년산성 문을 깨려 덤볐다가 멀쩡히 돌아간 적이 없다”는 식의 설화가 내려오기도 한다.
‘149승 1패’는 기록이 아니라 인터넷발 전설

온라인에서는 삼년산성이 “150번 공격받고 149번 승리, 단 한 번만 함락됐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는 없다. 『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시대 군현지 등 공식 기록에는 삼년산성의 상세 전투 전적이 남아 있지 않고, “삼년산성을 두고 벌어진 ○○전투” 같은 구체 전황도 확인되지 않는다.
일부 커뮤니티·위키 사이트에서 퍼진 149승 1패 설은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인터넷 루머로, 국내 성곽 연구자들도 “전설 수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다만 통설상 외세(왜·거란·여진 등)에 의해 함락된 사례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외적에게 뚫린 적 없는 요새” 정도의 평가는 비교적 널리 수용되는 편이다.
유일한 ‘1패’ 가능성, 김헌창 반란설

삼년산성이 함락된 적이 있다면, 그것은 대외 침략이 아니라 내부 반란으로 인한 점령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822년 신라 헌덕왕 시기 웅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충청 일대를 장악했는데, 이 과정에서 보은·속리산 방면 산성이 점령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부 지역사 서술에서는 이 시기에 삼년산성이 반란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구전·추정을 “1패”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직접적 사료 근거는 부족하다. 따라서 “외세에겐 단 한 번도 뚫리지 않았고, 내부 반란 때 잠시 넘어갔을 수 있다” 정도가 현재 학계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신중한 정리다. 그럼에도 삼년산성이 신라 중·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보수·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은, 이 요새가 전략적 가치와 방어력을 오랫동안 인정받았음을 방증한다.